효고 피혁산업협동조합 연합회

home history company contact

설립과 피혁의 역사

설립의 배경과 의의

각 지구에서는, 쇼와 28년(1953년)을 필두로 30년대~40년대에 각각 조합이 설립되어, 경제성장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해 왔다.
그런 가운데, 효고현의 전통있는 지역산업으로서 가죽 제조업 보다 건전한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조노력과 함께 지도단체・행정기관이 일체가 되어 피혁 산업 진흥 대책 사업의 실시가 필요하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현 산하의 업계 일체화를 도모하기위해, 엄격한 경제환경에 대해, 산지 진흥 사업을 실시하여 경제기반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쇼와 55년(1980년) 5월 26일 「효고현 피혁산업협동조합연합회」가 발족했다.

효고의 가죽 역사

● 히메지 백색 무두질가죽(시로나메시가와)은 귀중한 기술문화

인류가 최초로 몸에 착용한 의복은, 아마도 동물의 가죽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먹이인 동물에서 박피하여, 단순히 말리거나 문질러 비비는 것만으로 얻은 천연의 직물이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견디며 극한의 땅에 살거나, 빙하시대를 극복한 것도 모피라는 우수한 방한복의 활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죽 무두질은, 인류가 최초로 다룬 화학공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대표적인 가죽 무두질 방법은 코슈인덴(야마나시현의 전통 공예품)에 사용되는 사슴가죽과 히메지 백색 무두질 가죽(시로나메시가와/소가죽)으로 집약된다. 백색 무두질가죽(시로나메시가와)은 식물유 무두질의 일종으로, 세계적으로 보아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귀중한 존재이다.

효고현의 피혁산업의 발자취를 생각할 때, 옛날에는 반슈 무두질이라 불린, 이 히메가죽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현대의 제혁산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하리마의 가죽 무두질 그 중심은 히메지

하리마 지방에서 예로부터 가죽 제조업이 행해지고 있던 것은, 헤이안시대 말기의 법령집 「연희식」 중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산지가 하리마의 어디였는지는 현재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중세 이후에는, 그 생산의 중심지는 히메지 지구였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 무렵 「하리마의 가죽공은 뛰어난 무두질 가죽을 만들어, 당시의 무사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히메지의 다카기지구는 그 생산의 중심지이며, 백색 무두질가죽(시로나메시가와)을 산출했다. 이것은 원료의 가죽을 강물에 적셔, 모근부에 발생하는 박테리아의 효소의 힘으로 탈모하여 염분과 유채기름을 사용하면서 문질러, 햇볕에 쬐어 얇은 유백색 가죽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그 기법은 에도 중기에는 완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히메지는 우리나라에서 피혁의 고향으로서 저명하다. 그 발상지가, 이치카와의 상류 약 10 km에 있는 다카기지구이다. 이 지역에서 왜 예부터 가죽 무두질을 해왔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피혁산업으로서 지역육성이 번(에도시대 다이묘의 영지 또는 그 통치기구의 총칭)의 정책으로도 강하게 행해진 것 같다.

(1) 가죽 무두질을 하기에 적합한 이치카와라는 온화한 유수와 넓은 하원이 있었다.
(2) 서일본에서는 많은 소가 사육되고 있었기 때문에, 원료인 소가죽의 집하가 용이했다.
(3) 세토나이카이 기후의 특징으로서, 비교적 온난하고 비도 적은 토지였다. 햇볕에 가죽을 쬐고 말리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4) 가죽의 보존이나 처리에 필요한 염분의 입수가 용이했다.
(5) 오사카・쿄토 등 정치・ 경제・소비의 중심지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 가죽 무두질의 발상지

히메지의 백색 무두질가죽(시로나메시가와)은 옛날에는 코시나메시(越靼), 코시나메시(古志靼), 반슈나메시 또는 히메지나메시라고 불려왔지만, 그 제혁기술의 시작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전래가 있다. 집약하면 세 가지가 있다.

  1. 조선 전래설
    현지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신공황후 삼한정벌 때의 포로로 열피술에 뛰어난 자가 있어, 타지마의 마루야마강에서 시행해, 남하하여 이치카와에서 성공해, 마을 사람들에게 그 기술을 전달했다고 한다.
  2. 성옹(히지리 오키나) 주설
    그 옛날, 마쓰가세(다카기의 고칭이라함)의 푸조 거목 아래에 살던 박식한 노인에게서 배워, 제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노인을 성옹(히지리오키나)라고 존칭하고, 그것이 지역에서 모시고 있는 성신사의 제신이라고 불린다.
  3. 이즈모노구니 유래전설
    제혁의 기원을 신공황후 시대에 있다고 인정하는 한편, 겐로쿠시대 이즈모노구니 고시무라의 가죽상이 오사카 키즈가와에서 시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이치카와에서 양품을 얻어, 코시가죽(백색 무두질가죽)을 세상에 내놓고 명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전설이 혼합된 형태로 전해져 오고 있지만, 그 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사료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편, 제혁기술사적으로 생각하면, 현재의 수법이 그대로 옛날부터 있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수 백년 간의 기술적 변천과 결부시켜 이야기하는 것에 의해 그 전설의 의미를 갖는다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 다카노기신사에 합사된 히지리신사
● 사료에 보이는 피혁산지・하리마 고대에는 말가죽 생산

소가죽과 같이, 동물 가죽 중에서도 대형이고 경질섬유의 가죽 가공기술은, 사슴가죽으로 대표되는 중소동물 가죽 보다도 역사적으로는 후세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슴가죽은 가장 옛날부터 만들어진 것이며, 소말가죽의 가공의 시작은, 예를들어 일본 서기의 닌켄키에 있는 것처럼 제혁기술자 스루키의 도래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피혁생산지로서 하리마의 국명이 사료에 처음 나온 것은 엔초(延長) 5년(927)에 완성한 연희식이다. 동식의 민부(하)의 교역잡물(交易雑物) 무렵에는 각종 피혁의 산지로서 이가, 오와리, 미카와, 토오토미, 스루가, 이즈, 카이, 사가미, 무사시, 아와, 카즈사, 시모우사, 히타치, 오우미, 미노, 시나노, 우에노, 무츠, 데와, 에치젠, 카가, 노토, 엣츄, 에치고, 탄바, 탄고, 타지마, 이나바, 이즈모, 이와미, 하리마, 미마사카, 비젠, 빗츄, 아키, 스오우, 나가토, 아와, 사누키, 이요, 키이, 다자이후의 43개국이 있었다. 이 중 가장 많은 것은 사슴 가죽류 35개국, 소가죽류로 특정된 것이 14개국(국가수는 종류장으로 세고 있다)으로, 그 밖에도 가죽종이 있다. 이 외 「제국 진마혁/諸国進馬革」 에서는 오와리, 오우미, 미노, 타지마, 하리마, 아와의 6개국이 있어 합계 100장의 공진을 했고, 그 중 하리마는 32장을 차지하는 최대의 산지이다. 또한 사슴가죽은 미카와, 무사시, 우에노의 각 60장에 이어, 하리마는 이요와 나란히 50장을 생산하고 있다. 하리마는 소가죽류의 산지로서는 이름이 나지 않았다.

당시의 피혁의 용도로서는, 제례용 외에, 안장, 마구, 갑옷, 신발, 굽, 깔개, 의류, 허리띠, 도검, 궁도구, 끈, 장식품, 후키가와(풀무의 가죽) 등이 있다.

다카기지구에서 일찍부터 제혁업이 있었다는 증거의 하나로서, 잘 인용되는 것은 하리마풍토기의 시카마군 오가와무라의 항이다.


・・・・・・故号私里。・・・・・・改為小川里。・・・・・・所以称高瀬者、品太天皇、登於夢前丘、樹而望見者、北方有白色物。勅云、彼何物乎。即遺舎人上野国麻奈毘古令察之。申云、自高処流落水、是也。即号高瀬村。


이 문중의 백색물은 무두질 가죽을 햇볕으로 쬐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는 설, 그러한 이해는 부적당하다고 하는 설, 의문시하는 설 등 다양하지만, 이치카와의 흐름의 변천이나, 지형, 유메사키언덕(夢前丘)에서의 멀리 내다보는 것의 어려움, 호무다노스메라미코토(오우진천황/品太(応神)天皇)의 시대에 피혁생산을 기피하는 사상도 없었던 것, 한층 더 원망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대량의 피혁생산이 당시의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등의 이유로부터, 그 풍토기와 이치카와유역의 피혁생산을 안이하게 연결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 히메지 백색 무두질가죽(시로나메시가와) 햇볕에 말리기 쇼와 44년(1969년)
● 타이코 우물의 유래, 그리고 히메지 기념품에 가죽을 헌신

어쨌든 하리마의 가죽 생산은 무로마치 시대에 있어서는 매우 활발했다. 게다가 도요토미시대가 되면, 히메지와 피혁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꽤 나오고, 당시의 생산과 기술 레벨의 높이를 표시하게 된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당시 오다가의 가신 하시바치쿠젠모리 히데요시가 텐쇼연간(1573-1592), 주군 노부나가로부터 히메지성의 증축을 명 받았다. 당시 히메지 성주였던 구로다간베에게 영지와 함께 히메지성을 양도받아, 보청봉행의 구로다간베에와 아사노야헤이에게 명령해, 성의 개축에 착수했다. 그리고 텐쇼 8년(1580) 9월중순에 군사훈련을 함과 동시에, 가을 수확을 시찰하면서 다카기마을의 가메야마 산에 올라 캠프를 세웠다. 이 가메야마산(현재의 마에야마산)의 정상의 「시로타노텐」이라는 장소는 현재의 하나다 보육소 위에 있으며, 지금도 그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치쿠젠모리가 다카기무라에 들렀을 때, 노파가 한장의 가죽을 헌상했는데, 매우 기뻐해, 그 답례로서 요청에 의해 우물을 팠다고 한다. 이 우물은 타이코우물로서 존경받고, 어떤 갈수 때에도 솟아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치쿠젠모리는 또, 무구의 수리에 히메지 가죽을 시용했는데, 그 내구력과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특산물을 히메지성 개축기념 연하의 선물로서 다음 텐쇼 9년 (1581)년 12월 12일에 노부나가에게 반슈 기념품으로 누메가죽 200장 등을 헌상했다든가, 무로카쿠문고 1000개나 안장덮개가 있는 말 1000마리를 주었다고 한다.

이 당시, 피혁은 무구 조달의 면에서는 특히 중요한 자재였기 때문에 상당한 지역에 히메지의 가죽공이 분산되었다. 예를들어, 히메지일대의 영주인 구로다나가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공에 의해, 치쿠젠국을 받고 이주했을 때, 그 지역에 다카기마을을 만들고, 이전 영지에서「가와즈쿠리(가죽장인)」들을 초빙했다고 한다. 케이초 10년(1605)대에 후쿠오카현 사와라군에 마고자에몬 등이 초대되었고, 가가번에는 동 11년(1606) 하리마야 사에몬 고로가 초대되었다.

이 밖에 돗토리번에 겐나 3년(1617)에 갔다고 하고, 또는 가와니시라든가 이세방면에도 제혁 기술자가 히메지에서 이주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들은 모두 히메지의 뛰어난 제혁기술자를 각 번이 요구한 것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 에도시대의 사료에도 자주 볼 수 있다. 교토쿠 3년(1454)의 가마쿠라 연중 행사에 「하리마가와노시로키치카라가와 (하리마 가죽으로 만든 흰색 가죽 등자)」, 가쓰라가와 지장기의 「반카라치카라가와 (반카라 가죽 등자)」, 와칸산사이즈(중일백과사전)에는 무로츠 나메시가와(무로츠 무두질 가죽), 칸엔 2년의 하리마 호소미즈 후사이미야게 명물(하리마 그림 부록,1749) 히메지 가죽담배상자, 케후키구사(하이카이책) 에는 무로나메, 동베개, 말가죽 등의 문자가 보인다. 소켄키쇼에는 「반슈 히메지에서 제작. 5가지 색상, 각각 잎이 하나인 접시꽃과 흩어진 벚꽃 극인에 있어, 크기 한자 세치에 칠촌 오부임(49cm x 28.4cm). 붉은 가죽의 물건은 이중에서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히메지 백색 무두질 가죽(시로나메시가와) 은 양질 모두 각 시대를 통해 대표적인 피혁이며, 그 당시 가장 전형적인 제법이었다.

● 반슈의 가죽 제조업------에도시대

도쿠가와 중기 이후의 전국적인 상품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피혁업도 전국적인 상품유통 속에 통합되어, 그 발전을 이루고 있다.

피혁산업연혁사(상)에 따르면, 반슈지방의 제혁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반슈 히메지의 「시로나메시가와」나 그 「가죽세공물」은 전국적인 수요를 갖는 상품이 되었고, 히메지, 오사카, 에도, 오와리 등 상인의 손을 통해 전국에 판매되었다. 이런 상품에는, 주로 무기, 문고, 가방 등이 있고, 또 게타(높은 매듭이 있는 게타의 한종류)의 끈, 무코가케(츠마가케 또는 츠마카와. 정확하게는 츠메카와라고 쓴다. 나막신의 앞쪽 커버) 등이 있고, 또 가공 원료로서 「백색 가죽」에 대한 시장도 컸다.

히메지번에 있어 근세의 피혁업은, 이미 지역적인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봉건사회의 신분제 지배와 깊은 관련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을 근세의 신분제가 확립된 시기에, 영주의 권력으로 「위에서부터」 설치된 것이, 이윽고 상품경제의 발전에 따라 명확한 분업지역으로서 정착했다고 생각된다. 무두질 부문은, 히메지의 동쪽을 흐르는 이치카와 유역을 시작으로, 히메지의 서쪽을 흐르는 이보가와 유역에 위치하고, 그리고 가공부문은 히메지 성곽 마을내의 나카니카이마치에서 히가시니카이마치에 걸쳐 전개되었다.

전자의 무두질 부문은, 이른바 「백색 무두질가죽」의 제혁으로, 이치카와유역의 시카마군 다카기무라, 시고무라를 시작으로, 이보카와유역의 이보군 사와다, 센쇼, 마츠바라 등에서 행해졌다. 그 중에서도 다카기무라는 「백색 무두질가죽」제혁의 중심지이며, 그 제품은 다른 마을의 제품과 비교하여 훨씬 뛰어났다. 당시 가죽 제조 기술이 아직 초기 단계였을 때는, 자연적 조건이 생산을 좌우하는 큰 원인이었던 것은 당연했지만, 다카기무라가 「백색 무두질가죽(시로나메시가와)」의 제혁 중심지였던 것은, 이치카와의 수질과 그 밖의 자연조건에 축복받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가공부문은, 상자류, 문고류, 무구, 마구류, 훈련도구류 등의 제조가, 주로 성곽 마을인 나까니카이마치에서 히가시니카이마치에서 행해졌다. 그 때문에, 당시 참근 교대의 서국 다이묘는, 피혁 특유의 냄새 때문에 이 근처를 피해서 지나다녔다고 한다. 이들 상점 중 일부는, 수십번의 다이묘를 상대로 거래하는 곳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성곽 마을 이외의 시골에서도 「가죽 세공」이 행해지고 있었다. 즉, 당시의 서국 다이묘가 참근 교대 때 거점으로 한 무로츠(하리마나다에 면한 작은 항구)는, 이들 무사를 상대로 하는 기념품으로서, 주로 담배케이스, 무코카케(쓰마가케), 게타끈 등 제조판매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또한 에도, 오와리, 오사카와의 거래도 많아, 더 없이 융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무로츠에서는, 주로 이보카와유역의 센쇼, 사와다, 마츠바라, 다쓰노 등에서 만들어진 소가죽이 사용되어 왔다. 또 앞의 이치카와 유역의 고차쿠, 시고무라 카미스즈 등에서는, 다카기무라의 백색 무두질가죽만큼 최상급은 아니었지만 「하리기지」라 칭해, 게타끈과 이세유약이 만들어져, 거리에서 팔렸다고 한다.

쿄호 16년(1731) 11월, 마에바시 성주가 된 사카이 다다즈미는, 덴나시대(1681-1684) 이후, 궁핍해진 사카이 가문의 재정을 재편하고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특별히 막부에 히메지 이적을 청원하여 실현하고자 했다. 이 요청을 막부가 허가하였고, 칸엔 2년(1749) 1월, 하리마국 신토군, 진세이군, 가토군, 가사이군, 시키토군, 시키사이군, 가코군, 이나미군, 잇토군, 잇사이군 10개 군의 토지 15만석을 받아, 히메지 성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끊이지 않은 수해 때문에,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히메지번의 재정은 궁핍해졌다.

이 번의 재정 빈곤은 가신단에 대해 5할의 「쌀/아게마이」로 전가되었지만, 그것은 번 재정지출의 5분의 1도 안되는 정도였다. 그래서 가문의 돈은 바닥이 나고, 번주의 공적인 직무조차 수행할 수 없게 되고, 일족의 협력에도 불구하고, 번주 부자의 생계비, 각종 손님의 접대비 등 겨우 쌀 3만 5천가마 남짓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서, 번은 더욱 영내의 상인이나 영내 유지에 대해서, 「적금」=어용금을 명해 위기를 회피하려고 했으나, 에도, 오사카의 상인으로부터의 부채의 이자에 쫓겨, 새롭게 고리로 임시 차입을 하기에 이르러, 이자는 눈사람처럼 증대해, 점점 더 번의 재정 위기를 심화시켰다.

영내의 농민과 마을 사람에 대해서 검약령의 지시 등이 잇달아 내려졌지만, 절약할 만큼의 여유도 없고, 최저의 생활을 강제당했던 민중에 있어서는 거의 무의미했다. 그 사이 분카 4년(1807)에는, 부채총액이 73만량에 달해, 번의 재정 위기는 그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3대 번주 다다히로는 밤낮으로 고민한 끝에 분카 5년(1808) 12월, 가신 가와이 하야노스케를 에도에서 소환해, 재정개혁을 명하고, 일체의 시책을 일임해 여기에 히메지 번의 정치적 위기에 대응하는 여러 정책이 전개되었다.

● 번 재정을 지지한 가죽 제조업

분카 6년(1809)부터 이 개혁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비용 손실이 많고, 지불금은 미납되는 등 재정의 빈곤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래서 가신으로부터 쌀을 빌리고, 검약령이 반복적으로 발령되거나, 혹은 촌장의 대부분을 폐지해, 성 밖의 야시로무라에 번영 정유업소를 창설하는 등, 분카・분세이 시대(1804-1830)에 걸쳐 개혁이 실행되었다. 이 개혁은, 당시 발전하고 있던 가죽 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까.

분세이 3년(1820) 2월, 히메지 나카니카이마치의 가죽 세공물 장인 21명이, 가죽 세공물을 타 지역, 다른 마을에서 판매하지 말 것과, 타 지역 제품을 히메지에서 파는 것을 금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청원서를 제출했고, 법원은 그들을 보호하기로 했다.

연명인을 보호하는 번은 「가죽 협회 사무소를 니카이마치에 설치하여 제품에 일일이 날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죽 세공물의 생산을 장려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위기에 처한 번의 재정이, 이 가죽 세공물이 훌륭한 재원이 되었다고 할 만하다.

분세이 7년(1824) 8월, 번은 시카마군 다카기무라에 「가죽 협회 사무소」를 설치하고, 마스오 규다유(오사카 사카이의 공식상인), 오카베 준베에, 미모리 무기쿠라의 3명을 「가죽 담당」에 임명했다. 그리고 제품에는 전부 협회 사무소의 직인을 찍어, 장수에 따라 운상금을 부과한 것이다.

이렇게, 도쿠가와 중기이후의 전국적인 상품 경제 발전의 물결을 타고 전개되고 있던 히메지 번에 있어서의 가죽업도, 무두질과, 가공 과정 모두 번의 통제하게 되었다. 번은 기꺼이 가죽 산업을 보호・장려했지만, 그 제품은 일단 번의 「가죽 협회 사무소」를 통하지 않고는 처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같은 번의 가죽 산업은, 그 원피를 영내 죽은 소와 말에 한정하지 않고, 오사카 상인을 통해 원피가 이입되어 「백색 무두질 가죽」의 생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백색 무두질 가죽의 생산의 중심지였던 다카기무라에서는, 전 마을이 백색 무두질 가죽 제조를 해왔다고 한다.

덴포 시대(1830-1844), 다카기무라의 전경지 면적의 63%이상에 해당하는 경작지 14정 5단을 소유하고, 타인의 토지를 밟지 않고 이웃 마을에 갈 수 있을 정도의 대지주였던 니다유가 다카기무라의 「백색 무두질 가죽」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오야카타, 단나 등으로 불리며, 성곽과 같은 대저택에 거주하고, 오사카의 도매상에서 원피를 공급받아, 배로 시카마군 시고무라의 항구에 하역한 뒤, 다카세부네(물건을 운반하는 작은 배)에 다시 싣고 이치카와를 거슬러 올라, 화물의 도착과 동시에 그것을 마을 주민에게 할당하여 임가공시켰다.

이렇게 임가공된 제품은 다시 일괄하여 가죽 협회 사무소를 거쳐, 오사카의 도매상에 보내졌다고 한다. 사실, 다카기무라에 있어서 「백색 무두질 가죽」의 생산자는, 오사카상인 자본의 지배하에 있어서 임가공이라는 형태로 행해졌다. 따라서 도쿠가와 중기 이후의 히메지 번에 있어서 가죽 업은, 이른바「백탄 가죽」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분카・분세이 시대를 구분하는 번 재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정책의 하나로 번의 통제하에 통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번 재정의 위기과정에서 대상인과 공존관계를 맺고 있던 번 권력이, 토지 지배자를 통해, 거기에서의 피혁업의 전개에 대응하면서, 이윤을 얻고, 재정완화의 일조에 하고자 하는 의도는 앞에 언급한 가죽 협회 사무소의 설치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히메지번에 있어서 피혁업의 대략의 구조는, 이상과 같지만, 이것은 히메지번에만 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도쿠가와 중기이후의 상품경제의 발전에 따라 드러난 영주 재정의 빈곤은 각 번 공통의 현상이며, 각 번은 각각 이러한 방법으로 재정 건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이 무렵의 피혁업은 많거나 적거나, 이러한 정책의 재원 흡인조직 안에 편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특징있는 제혁방법

이 제혁원료는 고대에서는 말 가죽이었지만, 축산농업의 보급에 따라, 중세 이후에는 소가죽이 중심이 된 것 같다. 오사카시사에 따르면, 분세이시대(1818-1830)의 기술로서 「원래 소말가죽의 무두질은, 오사카 수도권 반슈이치카와 지역에서만 이루어졌고, 셋슈의 인청분은 이치카와부근인 히메지령 시키토군 다카기무라에 하청」하고 대량의 무두질이 행해져, 당시 번 재정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산만은 아니고, 수입소 원피도 상당히 이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법에 대해 서술한 기록은 에도시대 말기까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메이지(1868-1912) 이후의 연구 등으로 확실해진 주요 공정을 정리하자면, 강물에 담그기, 제모하기, 역모하기, 소금바르기, 기름 바르기, 건조하기, 가습하기, 건조 후 문지르기(수회 반복)이다. 이 순서는 엔기시키 가죽 제조 공정을 앞서 말한 것과


牛革一張(長六尺五寸,広五尺五寸,)。除毛一人。除膚肉一人。 浸水潤釋一人。曝涼踏柔四人。
소 가죽 한장 (장6척 5촌, 광5척 5촌). 제모(除毛)1명, 제부육(除膚肉)1명, 침수윤석(浸水潤釋)1명, 폭량답유(曝涼踏柔) 4명.


매우 닮은 것에 주목하고 싶다. 즉, 백색 무두질 가죽의 원형은 거의 천년전에는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1868-1912)전반의 오가키 가문 문서에는 무두질 가죽의 종류로서 구쓰가와(沓皮), 와가와탄(일본가죽/和皮靼), 초센탄(조선가죽/朝鮮靼), 헨죠탄(변녀가죽/変女靼), 고시탄(五志靼), 바탄(말가죽/馬靼), 츄모노탄(中物靼), 쇼가와탄(小皮靼)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법의 특징에 따라 구쓰가와(沓皮), 고시가와(古志革) 및 일반가죽으로 나뉜다.

다이쇼(1912-1926) 초의 쿄에이샤의 광고에는 구쓰가와, 토지가와, 하리키지(신축성)직물, 북가죽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제조 방법이 다소 달랐다. 하리키지는 에도말기의 혁신이었다.

이처럼, 히메지 백색 무두질가죽은 우리 나라가 세계적으로 봐도 자랑할 수 있는 가죽 무두질 기술의 대표적인 예시이며, 에도시대 말기에 이를때까지 성행했다. 메이지 이후, 생활의 서양화나 낮은 생산성, 혹은 신식 제혁법으로 식물 태닝이나 크롬 태닝의 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무두질 기술은 점차 쇠퇴하여 갔다. 특히 쇼와 20년(1945) 이후, 다카기지구에서는 크롬 무두질 가죽 제조가 일색이 되어, 백색 무두질 업자는 격감했다. 그 용도도 가죽 문고, 무도구나 기모노장식품, 야구볼, 소도구 등에 한정되어, 요즘은 히메지 특산품이라는 것에 그 존재 의의를 찾고 있다.

● 그 밖의 산지의 가죽 생산의 시작 다쓰노지방 카와니시 지방

제혁업의 시작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각지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다쓰노 지방〕
다쓰노의 마츠바라의 경우, 쇼와 31년(1956) 3월에 행해진 치쿠콘사이(축령제/동물의 영혼축제)의 축사 중에서 「약 400년전의 텐쇼 시대에 죽은 우마의 가죽으로 북의 제조를 하고, 신사 불각에 납입하고, 게다가 당일 무장의 명령에 따라 야마토신발(농업용의 신발), 마구, 북 등도 제조하였다」라는 취지가 전해지고 있다. 아마 현지 사람들도 그렇게 봤을 것이다.

가죽 제조업에 관련있다고 보여지는 사료가 나오는 것은 에도시대부터이다. 칸에이 9년(1632)에 와쿠무라의 생가죽 운반에 관한 트러블의 기록이 있다. 당시는 죽은 우마의 처리나 죽은 우마 가죽의 이용에 대해서 권리가 정해져 있어, 장소도 정해져 있었다. 처리가 미치는 범위는 단나바(농사짓는 곳)이나, 쿠사바(잔디밭), 소지바(청소장), 키요메바(깨끗한 들판) 등으로 칭했는데, 예를들어 야마시타, 니시가마에, 사카에, 토요, 하기와라, 마사고, 고우치 시장 등이었다. 따라서 가죽 제조업이라고 해도 처음에는 단나바(농사짓는 곳) 단위의 죽은 우마의 처리 수준이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원피를 다른 곳에서 구입하거나 또는 오사카 와타나베 마을에서 말 가죽을 가공하는 형태로 규모가 확대됐다고 보여 진다.

또, 호마레 지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행해지고 있었다. 에도후기 가죽 무두질이 활발했던 것은, 몬젠(현재의 마츠바라), 히로야마(현재의 호마레)이며, 칸세이 시대부터 분카시대 중기에 걸쳐서 돗토리 번내의 원피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분카・분세이 시대는 이들 마을들의 피혁 산업의 전성기였다. 텐포 시대에 들어가면, 전국 여러 번에서는 피혁용 원피에 눈을 돌리고, 전매제를 취하거나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특정인을 통하지 않으면 원피는 판매하지 않고, 이들 여러 번의 상층까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류 마을들은 원피 입수에 어려움이 있었다.

메이지시대 이후는, 하리키지의 제조가 역시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히메지 백색 무두질 가죽의 제법과 기본적으로는 거의 같았지만, 색은 별로 하얗지 않고, 딱딱한 것이었다. 하리키지는 옻을 발라 제품을 완성하는 것이 주체이며, 무로츠나 히메지에 출하하여, 담배케이스, 나막신 커버, 편지함 등으로 만들어 졌다.

또 생가죽(키가와)(피커)도 만들어졌다. 원료는 물소가죽으로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원피를 수입하여 방적용이나 검도 죽도의 칼날용 가죽 등으로 가공되었다. 크롬 무두질 가죽의 기술은 쇼와 초기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나카지마 지이치가 오사카의 니시야마에 크롬무두질 기술을 배우러가서, 기사가 되어 세토 타카노리의 공장에서 공동으로 연구 개발했던 것이 마츠바라에 퍼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무로츠의 가죽 세공에 대해서, 마츠바라 지구에서 집약한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 담배케이스
허리에 두르는 담배케이스는, 크게 키세루(담배 파이프)를 담는 통으로 고정하는 코시자시 담배케이스와 작은 용기를 옷의 띠에 고정한 궐련 케이스의 2종류로 나눌수 있다. 무로츠에서 출하된 담배케이스는, 「사게」라고 불리는 가마니뿐인 것과 이즈츠구미라고 불린 가죽이 붙어 있는 것이 주였다.

● 가죽 문고
문고는, 서적과 그 밖의 개인 소지품 등을 넣는 케이스였다. 나무나 종이에 옻을 바른 것이 예로부터 있었지만, 무로마치 시대(1333-1573)에 피혁 산업의 발달에 따라, 가죽을 붙인 것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 무코(쯔마카와)
게타 나막신의 발가락 끝에 걸어 빗물이나 진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덮개로, 재료에 마츠바라의 하리키지(신축성 있는 원단)를 많이 사용했다. 에도 시대 말기 즈음부터 세상에 나오기 시작해, 원래는 남자만이 사용했다. 무코는 관서지방에서의 호칭이다. 그 제작 공정이 간단하고 이익률이 좋아 무로츠에서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까지 그 양이 담배케이스보다 많았다.

● 금당가죽(킨카라가와)
가죽에 금속박(주로 은박)을 붙여 무늬를 만들고 위에 채색을 한 것으로, 유럽에서 벽이나 가구의 장식에 사용했다. 17세기 즈음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고, 그 금색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매우 진귀하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수입품이고 고가이기도 해서, 일본에서는 벽에 붙이는 일은 거의 없고, 담배케이스 등의 공예품에 사용되었다. 이 금당가죽(킨카라가와)의 모조품을 무로츠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광택은 진품 이상으로, 하리키지(스트레치 원단)에 옻을 입히고, 그 위에 금박을 붙이고, 그 위에 옻을 다시 바른 것이 그 금당가죽이라고 한다. 그 재료인 하리키지(스트레치 원단)는 1년간 4000장 내외 취급되었지만, 그 중 70%는 마츠바라에서 나머지 30%는 후쿠로지리, 히로야마, 사와다에서 조달 받고 있었다.

무로츠 가죽세공소와 원피 공급의 마츠바라 마을간에, 반드시 여기에서 사도록 권력에 의한 루트가 설정되어있었고, 마츠바라의 피혁업자에게도 은밀하게 사고파는 일이 없도록 요구했었다.


[가와니시지방](히우치)
상세한 기록은 알 수 없지만, 현지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와니시지구에서는, 게이쵸 8년(1603), 도쿠가와이에야스가 황실 방문을 위해, 히우치의 관리들에게 밧줄을 만들고 가죽을 무두질 하라고 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그 무렵에 가죽 무두질을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보인다. 또 칸에이(1624-1644)시대 무렵, 하리마에 사는 니시모리라는 사람이 이 지역에 와서, 가죽 제조의 장점을 강조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업을 시작하도록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겐로쿠 8년(1695)의 기록에서는, 가죽 생산은 여전히 소규모였다고 한다.

에도시대 말기의 겐지・케이오시대 무렵, 원료는 니시하마라고 불리는 와타나베무라에서 구입하고, 토지카와라고 불리는 백색 무두질 가죽을 제조했었다. 토지카와는 가죽끈, 갑옷, 도검의 롤, 칼집 롤, 검도구, 세공용 가죽, 래커 가죽 등이 오사카, 히메지 등에서 판매되었다. 또 가죽하오리코트와 가죽 하카마치마 및 샌들 등에도 백색 무두질 소재(묘반<밀리리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원료는 말가죽, 소가죽이 주였다.



▲Page Top

home history company contact
Ⓒ Hyogo Leather Industry Cooperative Federation. all rights reserved